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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 장군의 일생과 동상 이전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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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 장군 일생

홍범도 장군은 1868년에 평양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노동자, 건설현장 노동자, 제지 공장 노동자, 사냥꾼 및 광산 노동자로 어려운 삶을 살았으며,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면서 살았습니다. 1895년에 그는 강원도 회양에서 일어난 반일 운동을 시작하고 일본인 군인을 처단함으로써 항일 운동에 참여했습니다.

홍범도 장군홍범도 장군
홍범도 장군

 



1910년 한국이 일본에 편입된 후, 그는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군을 훈련시키는 데 힘썼습니다. 1919년에 그는 간도국회의 한국독립군 사령관이 되어 일본군을 공격하기 위해 조국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이후 독립운동 단체들을 통합하고 한국독립군을 조직하며 김좌진과 함께 부지사로 재직했습니다.

1920년에 일본군이 본고동을 공격할 때, 그는 본고동 전투에서 3일 동안 120명을 처치하며 그의 최대 승리를 거두었고, 그 후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과 함께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파했습니다.

그러나 그때쯤에 그는 아내와 아들을 모두 잃었습니다. 간도재난과 자유시재난을 겪은 후 그는 한국 반도로 돌아가지 않고 만주로 남아 가족들이 만주로 갈 때 이미 모두가 사망했기 때문입니다.

1922년에 그는 극동의 공산 국제가 주최한 국제 공산 국제회의에 참석하여 극동에서의 식민지와 반식민지 혁명가로서 활동했습니다. 그는 1927년에 소련의 볼셰비크 당에 가입했지만, 1937년에 스탈린은 한국인을 일본인으로 인식하여 강제 이주시켰습니다. 그는 키즐랴르다로 이사하여 거기서 농촌 집단농장을 경영하며 나중에는 고려극장의 관리자로 일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는 1943년에 76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유해는 나중에 대한민국의 광복일인 2021년 8월 15일에 대전 국립묘지에 매장되었으며, 그에게는 대한민국 건국훈장이 훈장으로 수여되었습니다.

홍범도 장군홍범도 장군
홍범도 장군



봉오동전투

봉오동 전투는 1920년 6월 6일부터 6월 7일까지 만주에 주둔 중이던 홍범도, 최진동, 안무 등이 이끄는 대한군북로독군부의 독립군 연합부대와 신민단 예하 이흥수, 한경세의 신민단 독립군 1개 중대가 연합하여 중국 지린성 화룡현 봉오동에서 일본군 제19사단 월강추격대, 남양수비대 예하 1개 중대와 싸운 전투입니다.
이 전투는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제로 병탄 한 이래, 독립군이 일본 정규군과 대규모 전투를 벌여 최초로 승리한 사건입니다.

 

홍범도 장군홍범도 장군
홍범도 장군



청산리전투

청산리 전투 또는 국내 한정 청산리 대첩은 1920년 10월 김좌진, 나중소, 서일, 이범석의 북로군정서군, 홍범도가 지휘하는 대한독립군, 대한신민단 예하 신민단 독립군을 주축으로 한 만주 독립군 연합 부대가 중화민국 길림성 화룡현 청산리 백운평·천수평·완루구등 간도에 10여 차례 출병한 일본 제국 육군과 벌인 전투입니다.
이 전투는 좁게는 이 백운평 전투를 이르지만 이후 전개된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과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등을 주력으로 한 독립군부대가 청산리 일대에서 10여 회의 교전 끝에 일본군을 대파한 전투입니다.

 

홍범도 장군홍범도 장군
홍범도 장군

 

자유시참변

 

자유시 참변은 1921년 6월 28일 극동 공화국 내 스보보드니에서 붉은 군대의 통수권 접수를 거부한 한인 망명 독립군들이 포위 진압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자유시 사변, 헤이허 사변으로도 불립니다.
이르쿠츠파와 상하이파 간의 공산주의 권력다툼에 대한독립군이 막대한 피해를 입은 참변이었다.
이 사건으로 대한독립군단은 와해되었고,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했던 서일은 이 사건에 대해 책임을 지고 두 달 후 밀산에서 자살했다. 당시 이범석, 김홍일 등 일부 독립군은 러시아 이만으로 가지 않고 만주에 남아 있었고, 김좌진은 이만까지 갔다가 만주로 돌아왔기에 병력을 보존할 수 있었다.

홍범도 장군
홍범도 장군


육군사관학교 홍범도 장군 동상 철거논란

홍범도 장군 동상과 독립 운동가들의 동상을 군사 학교 캠퍼스의 정무관 앞에서 철거하고 독립기념관으로 이동하는 절차를 추진 중이라고 2023년 8월 25일에 군사 학교가 발표함으로써 논란이 일었습니다.
그리고 3일 뒤인 8월 28일에는 국방부와 합동참모본부 본관에 설치된 홍범도 장군의 동상 또한 철거될 것이라고 발표되었으며, 8월 30일에는 박승환 사령관의 동상 역시 철거 및 이동 대상임이 밝혀졌습니다.

홍범도 장군홍범도 장군
홍범도 장군

 
 
이러한 모든 논란의 시작점을 제공한 사람은 국민의힘 소속 국회의원으로 군사 학교 출신으로, 2022년 정기 국회 감사에서 "홍범도 장군은 본고동 전투에 기여했다고 하지만, 자유시재난에서 독립군의 씨앗을 말렸다"며 "소련군이라는 이른바 소련군이 된 이 사람을 왜 대한민국 군사 학교에 동상을 세웠을까"라고 지적한 것입니다. 2022년 11월, 대한민국 군사 학교는 국회 지적을 받은 까닭으로 동상의 이전을 추진하기 시작했습니다.

국방부의 철거 사유 국방부의 철거 사유는 군사 학교의 입장과 이종섭 국방부장관의 발언에서 나온 것으로 다음과 같습니다. 동상 중 한 명은 소련 공산당원이었습니다. 대한민국 군사 학교는 공산주의 세력과의 전투를 준비하는 장소이므로 공산주의 활동 이력이 있는 사람들의 동상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입니다.
 
 
군림군 이후 군사 분야에 적합한 인물의 동상을 전시하는 것이 독립운동보다는 군사 창설 이후로 더 적절하다고 합니다. 현재, 국가 위기 극복의 역사가 특정 시기로 한정되어 있는 문제가 있습니다.

홍범도 장군홍범도 장군
홍범도 장군
홍범도 장군
홍범도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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